연구주제의 대부분은 번뜩이는 영감이 아니라 선행연구의 빈칸에서 비롯됩니다. 논문 52편에서 등장하는 서론을 분석한 문헌은 그 빈칸을 혼란의 빈칸, 방치의 빈칸, 적용의 빈칸, 그리고 전제를 뒤집는 문제화의 네 가지로 유형화하였습니다. 당장 오늘이라도 연구주제를 만들 수 있는 빈칸 찾기(gap-spotting)와 채우기 기술을 공개합니다.
이 글의 순서 6개 항목
1971년, 사회학자 Murray Davis는 스스로 만든 짓궂은 질문에 한참 동안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이론은 왜 위대해졌는가. 그리고 여러 고전 이론들을 분석한 끝에 얻어낸 답은 뜻밖이었습니다. 이론은 참(true)이어서가 아니라 흥미롭기 때문에 유명해졌고, 흥미로움은 독자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생각을 부정하는 데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0년이 흐른 뒤에 두 명의 경영학자가 Davis의 통찰을 통해 연구주제를 만드는 방법에 대입하였습니다. 흥미로운 연구주제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두 사람은 조직연구에 관한 논문 52편의 서론을 분석해서 연구주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탐색하였습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연구주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번뜩이는 영감으로부터가 아니라, 선행연구의 빈틈없는 고찰을 통해 발견되는 ‘빈칸’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아직도 논문 주제를 선정하지 못한 많은 분들에게 빈칸 찾기의 기술을 공개합니다.
연구주제의 선정은 번뜩이는 영감에서 비롯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Sandberg & Alvesson(2011)의 연구 결과는 영감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연구진은 조직연구 분야를 다루는 52편의 논문을 대상으로 각 논문이 제시하는 연구문제가 어떠한 흐름을 통해 만들어 지는지를 서론으로부터 역추적하였습니다. 연구의 결과에 따르면, 대다수의 논문에서는 연구문제가 선행연구에서 나타나는 빈칸(gap)을 지목하고 그것을 채우겠다고 선언하는 방식, 곧 빈칸 찾기(gap-spotting)의 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비록 각각의 논문이 접근하는 연구 패러다임이 서로 다르더라도 대부분의 논문이 빈칸을 찾아가며 연구문제를 설계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Sandberg & Alvesson(2011)의 발견은 초보 연구자에게 두 가지 종류의 소식을 전합니다. 하나는 위로입니다. 연구 경험이 풍부한 연구자들조차도 텅빈 무(無)에서 연구주제를 창조하지 않았고, 선행연구를 열심히 탐독하며 비어 있는 곳을 찾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절차와 노력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빈칸의 종류입니다. 빈칸은 종류가 많고, 종류마다 찾는 요령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 Davis, M. S. (1971). That’s interesting! Towards a phenomenology of sociology and a sociology of phenomenology. Philosophy of the Social Sciences, 1(2), 309–344. https://doi.org/10.1177/004839317100100211
- Sandberg, J., & Alvesson, M. (2011). Ways of constructing research questions: Gap-spotting or problematization? Organization, 18(1), 23–44. https://doi.org/10.1177/1350508410372151
빈칸 찾기 기술의 세 가지 유형은 무엇인가?
첫째는 혼란의 빈칸입니다. 같은 주제를 다룬 연구들의 결과가 서로 어긋나고 있다는 특징을 가집니다. 예를 들어서, 재택근무가 생산성을 높인다는 보고와 낮춘다는 연구결과가 서로 공존하는 상황이 전형적인 예시입니다. 이 유형의 연구문제를 다음의 문장으로 진술할 수 있습니다. “A를 보고한 연구와 B를 보고한 연구가 서로 충돌한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드는가.”
둘째는 방치의 빈칸입니다. 중요하다고는 이미 많은 논문에서 언급이 되어 왔는데, 그에 대한 연구는 막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특징을 가집니다. 빈칸의 세가지 유형 중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됩니다. 방치의 빈칸에 관한 연구문제를 진술할 때에 담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에 관한 중요성은 다수의 문헌에서 반복되어 지적되어 왔으나, 이를 확인한 연구의 사례는 아직 관찰되고 있지 않다.” 즉, 간과된 대상과 연구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집단, 확인된 연구결과를 인용하지 않고 통용으로만 이어져 온 주장이 모두 이 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저자의 논문 두 세편들이 모두 동일한 빈칸에 대해 연구의 한계점으로 지적하고 있다면, 그 빈칸은 채울만한 가치가 있는 빈칸입니다.
셋째는 적용의 빈칸입니다. 검증된 이론을 새로운 맥락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빈칸입니다. 즉, 아직까지 특정한 이론이 적용되지 않은 경우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서, “OOO이론은 서구 대기업의 맥락에서 그 유용성이 널리 확인되어 왔다. 하지만 한국의 중소기업 환경에서도 과연 그 이론을 활용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이 적용의 빈칸을 드러내는 연구문제의 전형적인 문장입니다. 82편의 학술지를 분석한 Locke & Golden-Biddle(1997)의 연구 결과에서도 대부분의 저자가 선행연구로부터 드러나는 빈칸을 지목하면서 자신의 연구가 그 빈칸을 채우겠다는 선언을 서론에서 진술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빈칸이 있다는 지목은 연구문제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사용하는 표준적인 수사이기도 한 것입니다.
- Locke, K., & Golden-Biddle, K. (1997). Constructing opportunities for contribution: Structuring intertextual coherence and “problematizing” in organizational studies. Academy of Management Journal, 40(5), 1023–1062. https://doi.org/10.5465/256926
빈칸 찾기를 위한 네 번째 방법, 문제화(problematization)는 무엇인가?
선행연구의 히스토리가 그려진 지도에서 나타나는 빈 곳을 채우는 것이 빈칸 찾기라면, 문제화는 지도 그 자체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Alvesson & Sandberg(2011)는 선행연구들이 흔히 기반으로 삼는 전제를 탐색한 후에 그 전제 자체를 뒤집어서 연구문제를 설계하라고 제안하였습니다. 이를테면 “리더십은 조직 성과를 높인다”라는 전제에 대하여 “리더십이라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관찰되기는 하는가?”라고 되묻는 방식입니다.
Davis가 언급했던 흥미로움을 다시 언급한다면, 바닥에 깔려 있는 가장 기초적인 전제를 건드리는 이론이야말로 ‘당연함’을 부정하고, 따라서 독자의 기억에 오래 남게 됩니다. 다만 이를 위해서는 균형 감각과 연구역량이 필요한데, 전제를 뒤집는 질문이야말로 강력하게 어필할 수 있는 연구주제가 될 수 있지만 그만큼 방어해야 할 부분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실무의 관점에서는, 처음으로 학위논문을 쓰는 분들은 빈칸 찾기를 기본적인 방법으로 삼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문제화는 논의(discussion)를 다루는 챕터에서의 두어 문단에 소량으로 얹는 조합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 Alvesson, M., & Sandberg, J. (2011). Generating research questions through problematization. Academy of Management Review, 36(2), 247–271. https://doi.org/10.5465/amr.2011.59330882
연구주제를 선정해야 한다면, 오늘 해야 하는 다섯 단계는 무엇인가?
다음의 다섯 가지 단계를 제안합니다.
- 관심을 가지는 연구분야에서 가장 최근에 출판된 체계적 문헌고찰(systematic literature review) 또는 메타분석(meta-analysis)의 결과를 담은 논문 각 3편을 탐색합니다. RISS나 Google Scholar, 또는 재학 중인 대학교의 전자 도서관을 이용하면 됩니다.
- 논문 각 3편에서 등장하는 연구의 한계와 향후 연구방향이 등장하는 부분을 읽으며 별도의 메모를 남깁니다. 이 내용들은 논문 저자가 다음의 연구자를 위해 남겨 둔 ‘빈칸’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 별도의 메모가 남겨진 문장들을 ‘혼란의 빈칸’, ‘방치의 빈칸’, ‘적용의 빈칸’으로 분류하고 이 결과를 테이블로 만듭니다. 어느 빈칸에도 걸치지 않는 문장은 삭제합니다.
- 연구자의 흥미를 가장 유발하는 각 빈칸이 담긴 문장 하나를 선택하고 의문문의 형태로 문장을 설계합니다. 예를 들어서, “~는 확인되지 않았다”를 “~인가?”로 수정한 문장이 바로 연구문제의 초안으로 완성됩니다.
- 초안으로 작성한 3개의 의문문에 대해서는 데이터 수집의 접근성과 연구자의 일정을 기준으로 점수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3개의 의문문을 각기 다른 연구주제로 변형합니다.

| 가상 시나리오: 사회복지학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대학원생 B씨는 두 학기 동안 논문 주제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B씨의 관심 분야는 노인 돌봄이었지만, 논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다른 연구자들이 모든 연구를 이미 다 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B씨는 다섯 가지 단계를 그대로 따라서 했습니다. 최근 5년 동안 출판된 3편의 리뷰논문을 찾아서 연구의 한계점과 향후 연구방향을 드러내는 17개의 문장에 메모를 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빈칸’ 분류표에는 4개의 ‘혼란’, 9개의 ‘방치’, 4개의 ‘적용’이 어느새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구자는 ‘방치’를 자신이 원하는 ‘빈칸’으로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양보호사가 인식하는 감정노동 수준의 평가에 관한 연구는 많은 사례가 관찰되고 있지만, 야간에 근무하는 보호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는 매우 드물다고 진술하는 문장을 설계하였습니다. 이 문장은 “야간 전담 요양보호사의 감정노동이 소진에 미치는 영향은 주간 인력과 비교하여 다른 영향력을 가지는가”라는 연구문제로 수정하였습니다. 잠깐 동안의 연구를 통해 설계한 문장을 지도교수에게 보여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연구문제를 담은 연구계획서가 프로포절 심사에서 통과되었습니다. 이 사례는 프라임이 실무 컨설팅 현장에서 체험한 상황을 참고하여 재구성한 가상의 시나리오입니다. |
자주 묻는 질문 (FAQ)
Q. 빈칸 찾기란 무엇인가요?
A. 선행연구에서 비어 있는 공백을 탐색하고 그것을 채우는 방식으로 연구문제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논문 52편을 분석한 문헌에서는 다수의 연구문제가 이 방법으로 만들어진 사실이 공개되었습니다. 빈칸은 ‘혼란’, ‘방치’, 그리고 ‘적용’을 포함하는 3가지 유형으로 분류됩니다.
Q. 만약 저의 관심 연구분야를 다루는 리뷰 논문을 찾을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리뷰 논문을 찾을 수 없더라도 관련 연구영역에서 출판된 5편 정도의 논문은 리뷰 논문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많은 논문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연구의 한계일수록 믿을 수 있는 ‘빈칸’입니다. 또는, 관심 분야와 인접한 분야로부터 리뷰 논문을 빌려오는 방법도 좋은 대안입니다.
Q. 만약 빈칸이 너무 많아서 선택하기가 어려우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학문적인 매력이 아니라 실행 가능성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서 수집할 수 있는 데이터인지의 여부, 학위 일정 내에 마무리할 수 있는 연구문제인가의 여부로 판단해야 합니다.
Q. 연구의 사례가 전혀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연구주제가 될 수 있나요?
A. 될 수 없습니다! 연구의 사례가 없는 현실적인 이유는 그 연구를 수행할 필요성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방치’의 빈칸에는 반드시 ‘왜 채워야 하는가?’에 관한 문헌적인 근거가 함께 등장해야 합니다. 이에 관하여 많은 연구자들이 빈칸 찾기의 함정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Q. 초심 연구자가 문제화를 하기에는 너무 어렵지 않을까요?
A. 현실적으로 부담이 큰 것은 사실입니다. 만약 학위논문을 처음 작성하는 연구자라면 빈칸 찾기를 중심으로 연구주제와 연구문제를 설계하고, 문제화는 논의 챕터에서 가볍게 다루는 것을 권장합니다.
Q. 석사학위 논문 vs. 박사학위 논문의 연구주제를 선정하는 방법은 서로 다른가요?
A. 서로 다른 독자의 눈높이를 고려해야 합니다. 석사학위 논문의 주제를 선정할 때에는 ‘적용’의 빈칸을 메우는 것과 같이 이미 검증된 이론이나 프레임워크를 기반으로 안전하게 출발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이에 반하여,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를 선정할 때에는 ‘방치’나 ‘혼란’의 빈칸을 메우는 것이 독자적인 공헌이라는 점을 강하게 어필해야 합니다. 그리고 ‘문제화’로 접근하여 이론적 측면에서의 기여를 요구받기도 합니다.
결론
이론은 흥미롭기 때문에 기억됩니다. 그런데 그 흥미로움의 출발점은 생각보다 소박합니다. 남들이 읽고 지나친 논문에서의 마지막 한 문장, 아직 아무도 쳐다보지 않은 곳이 바로 그런 자리들이었습니다. 어느 순간에 생기는 번뜩이는 영감을 기다리는 것과 빈칸을 찾는 것 가운데, 여러분들은 후자를 선택하시기를 제안합니다.